기후 재난으로 주정부 예산이 압박을 받는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주의 입법자들이 화석연료 기업에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피해 비용을 부담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기후 전문 매체인 코퍼릿 나이츠(Corporate Knights)는 21일(현지시각) 미국 각 주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기후 슈퍼펀드' 입법 움직임을 보도했다.
배출 기여도 따라 기업에 청구…법안 확산 이끄는 ‘귀책 과학’
버몬트주는 지난해 5월 처음으로 기후 슈퍼펀드 법안을 통과시킨 주가 되었다. 이 개념은 1980년 제정된 연방 슈퍼펀드법에서 착안된 것으로, 해당 법은 기업이 유해 폐기물 유출 정화 비용을 책임지도록 한다. 이번 주(state) 차원의 입법안은 주요 석유·가스 기업이 수십 년간의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 비율에 따라, 기후 재해 및 적응 비용을 부담하도록 요구한다. 해당 법안은 2023년 버몬트주 전역에서 폭우로 인한 홍수를 겪은 이후 통과됐다. 뉴욕주는 같은 해 12월 두 번째로 해당 법안을 통과시켰다.
올해 들어 캘리포니아부터 메인주까지 11개 주가 자체적인 기후 슈퍼펀드 법안을 발의했다. 버몬트와 뉴욕의 법안이 화석연료 기업, 공화당 주정부, 트럼프 행정부의 법적 도전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추진 동력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입법자들은 홍수·산불 등 기후 재난으로부터 인프라를 보호하고 복구하기 위한 재원을 확보할 방법을 찾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콜럼비아대 사빈기후법센터(Sabin Center for Climate Change Law)의 마틴 록맨(Martin Lockman) 연구원은, 최근 입법 확산의 이유로 ‘귀책 과학(attribution science)’의 발전을 꼽았다. 기후 모델을 통해 특정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이 극한 기후 현상과 연결되었는지를 분석할 수 있게 되면서, 정부가 어떤 기업이 얼마나 부담해야 하는지를 정량적으로 계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버몬트주의 법은, 1995~2024년 동안 주요 석유·가스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이 주에 끼친 피해 비용을 산정한 뒤, 기업별 책임 비율에 따라 청구서를 발송하고 해당 기금을 기후 인프라 및 회복력 구축 사업에 사용하는 구조다.
뉴욕주의 법은 이와 달리 목표금액을 먼저 정한 방식이다. 총 750억달러(약 10조1300억원)를 25년에 걸쳐 연 30억달러(약 4조500억원)씩 특정 화석연료 기업으로부터 걷도록 하고 있으며, 기업별 납부액은 2000~2024년 온실가스 배출 비율에 따라 산정된다. 두 법안 모두 해당 기간 동안 온실가스를 10억톤 이상 배출한 기업을 대상으로 하며, 엑손모빌(Exxon Mobil), 셸(Shell) 등 대형 에너지 기업이 포함된다.
주 단위 법안에 트럼프 행정부 반격…기후재정 책임 공방 심화
올해 기후 슈퍼펀드 관련 입법 중 실제로 주 의회를 통과한 것은 현재까지 메릴랜드주 법안이 유일하다. 또한 캘리포니아는 법안 통과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받고 있다. UCLA 로스쿨의 사브리나 애시지언(Sabrina Ashjian) 연구원에 따르면, 이번 회기 발의안은 환경·지역사회·노동단체의 폭넓은 연대를 바탕으로 추진되고 있으며, 1월 로스앤젤레스 산불 이후 입법 긴급성이 부각되었다. 해당 법안은 현재 각 입법부 환경위원회를 통과하고 사법위원회 심의를 앞두고 있다. 통과 시 상·하원 본회의 표결로 넘어간다.
한편, 트럼프 행정부와 화석연료 업계는 기후 슈퍼펀드 법안의 위헌성을 근거로 정면 반박에 나섰다. 올해 1월 미 상공회의소와 미국석유협회(API)는 버몬트주 법안에, 2월에는 공화당 주검찰총장 22명이 뉴욕주 법안에 각각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기후 손해 관련 법은 연방 대기청정법(Clean Air Act)에 따라 연방정부 소관이며, 주정부의 독자 입법은 주간 통상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5월에는 미 법무부(DOJ)가 버몬트·뉴욕주 정부를 상대로 기후 슈퍼펀드 관련 소송을 제기하며 법적 공세에 가세했으며, 이어 하와이·미시간주에서도 유사한 소송이 제기됐다.
록맨 연구원은 “이번 조치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발동한 행정명령에 따른 것이며, 해당 명령은 주 기후정책을 연방정부가 직접 제지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행정명령 자체는 법적 효력이 없다”고 덧붙였다. 버몬트법대 패트릭 파렌토(Patrick Parenteau) 교수는 “연방정부의 소송은 기각될 가능성이 높고, 기존 주정부 법안과 병합될 수도 있지만 새로운 논거는 없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화석연료 업계의 소송은 예견된 수순이며, 입법자들은 기후 위기 비용 분담에 대한 질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장기적인 전략으로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록맨은 “예산 편성과 주 운영 전반에서 기후 피해의 분담 방식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기후 슈퍼펀드를 추진하는 입법자들은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