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빅테크 기업과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에 굴복해 AI와 개인정보 보호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19일(현지시각) 로이터는 EU 집행위원회가 '디지털 옴니버스' 패키지를 통해 고위험 AI 규제 시행을 16개월 연기하고 기업의 개인정보 활용 제한을 완화하는 내용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EU가 AI가 규제를 완화했다. / 픽사베이 
EU가 AI가 규제를 완화했다. / 픽사베이 

 

고위험 AI 규제 2027년으로 연기…개인정보 활용 문턱 낮춰

이번 규제 완화의 핵심은 고위험 AI 시스템에 대한 엄격한 규제 시행을 당초 2026년 8월에서 2027년 12월로 16개월 미루는 것이다. 고위험 AI는 생체인식, 도로교통, 전력·가스·수도 공급, 채용과 시험, 의료서비스, 신용평가, 법 집행 등 민감한 영역에서 사용되는 AI를 의미한다.

개인정보 활용 규제도 크게 완화된다. 집행위는 어떤 데이터가 '개인정보'로 간주되는지 기준을 재정의해 익명화된 정보는 해당 주체를 재식별할 수단이 없다고 판단되면 개인정보로 보지 않기로 했다. 기업들은 건강정보나 생체정보 같은 민감 개인정보가 포함된 대규모 데이터셋도 합리적인 제거 노력만 기울이면 AI 학습에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알파벳의 구글, 메타, 오픈AI 등 빅테크 기업들이 유럽 시민의 개인정보를 AI 모델 학습에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지멘스, SAP 같은 유럽 기업들도 AI 규제 완화를 요구해왔다.

쿠키 동의 팝업도 대폭 줄어든다. 사용자가 6개월간 유효한 단일 클릭이나 브라우저 설정을 통해 한 번에 쿠키 선호도를 정할 수 있게 되며, 방문자 집계 같은 기본 기능에는 동의 팝업이 필요 없어진다.

중소기업의 규제 부담 경감도 포함됐다. AI 시스템을 개발하거나 사용하는 중소기업은 문서 작성 요건이 크게 줄어 연간 최소 2억2500만유로(약 3800억원)를 절감할 것으로 집행위는 추산했다. 고위험 시스템이라도 절차적인 행정 업무나 사람의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는 등 제한적으로만 쓰이면 EU 데이터베이스 등록 의무도 면제된다.

집행위는 또 27개 회원국에서 통용되는 '유럽 비즈니스 월렛'을 도입해 기업들이 디지털로 문서를 서명하고 제출할 수 있게 했다. 이 조치가 광범위하게 채택되면 연간 최대 1500억유로(약 253조원)의 행정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집행위는 밝혔다.

 

"빅테크·트럼프에 굴복" vs "혁신 위해 불가피"

이번 조치는 격렬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27개 시민단체는 공개서한에서 이번 조치가 EU 역사상 디지털 기본권의 가장 큰 후퇴라고 비판했다. 브뤼셀 시내에는 집행위원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에게 빅테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맞서라고 촉구하는 이동식 광고판 4대가 배치되고 수백 장의 포스터가 붙었다.

개인정보보호 단체 noyb의 막스 슈렘스는 "이제 모든 데이터가 메타, 구글, 아마존의 알고리즘에 투입된다"며 "AI 시스템이 가장 은밀한 세부사항까지 파악해 사람들을 조종하기 쉬워진다"고 경고했다. 네덜란드 의회 의원 김 판 스파렌탁은 성명을 통해 "집행위가 트럼프 행정부와 빅테크 로비의 압박에 굴복하는 모습은 실망스럽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EU 규제가 미국 기업을 표적으로 삼는다며 지속적으로 비난해왔고, 집행위는 이를 부인해왔다. EU는 이전에도 기업과 미국 정부의 반발을 받아 일부 환경 규제를 완화한 바 있다.

반면 기술 업계는 환영하면서도 불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알파벳, 메타, 애플이 회원사인 기술 로비단체 CCIA 유럽은 환영할 만한 조치지만 더 대담한 행동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금융서비스 업계단체 AFME도 긍정적이지만 미흡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집행위 관계자는 브리핑에서 "단순화가 규제 완화는 아니다"며 "규제 환경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발디스 돔브로브스키스 EU 경제담당 집행위원은 "유럽은 디지털 혁명의 완전한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며 "변화하는 세계의 요구를 따라가지 못하는 대가를 치를 여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헤나 비르쿠넨 EU 반독점 담당 집행위원은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이해관계자들이 있을 것이고, 너무 많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라며 "우리는 균형 잡힌 패키지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깁슨던 로펌의 AI·기술 규제 전문가인 아메드 발라디는 로이터에 "집행위가 EU의 핵심 보호장치를 유지하면서도 혁신가들의 마찰을 줄이는 더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규칙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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