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디스카운트. 주식시장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단어다. 이 단어가 언제부터 사용됐을지 궁금해서 찾아봤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외환위기 이후 한국 시장을 분석하는 외국의 애널리스트가 먼저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부터 국내 언론에서도 코리아디스카운트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외환위기 극복 후 경제가 계속 발전해나가는 데도 불구하고 세계 다른 나라에 비해서 밸류에이션 지표(PER, PBR 등)가 지속적으로 낮게 나타나는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고, 그러면서 계속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부터 새로운 용어가 주식시장에 등장했다. 바로 ‘밸류업’이다. 코리아디스카운트를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단어다. 왜 지금에서야 이런 제도가 시행되는 걸까? 가장 큰 이유는 전체 국민 중 주식투자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가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홍콩 크레디리요네증권(CLSA)의 자료에 따르면 2014년 대한민국 국민 중 주택 보유자는 1270만 명인데 반해, 주식투자자는 440만 명으로 3분의 1에 불과했다. 그런데 2023년에는 주택보유자 1550만 명, 주식투자자 1420만 명으로 주택을 가진 사람과 주식투자자의 수가 거의 동일해졌다. 주식시장과 연동되는 국민의 숫자가 크게 증가하니 정부 차원에서 주식시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밸류업을 위한 투자자의 역할
현재 밸류업에 대한 이야기의 대부분은 기업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초점이 있다. 특히 주주환원이 많이 강조되고 있다. 우리나라 주주환원이 아직 주요 국가에 비해 미진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강조돼야 할 부분이다.
주주환원은 자본의 효율적인 배치의 결과물이다. 불확실성을 대비하겠다는 이유로 과도한 현금을 오랜 기간 쌓아 두거나, 이익보다는 매출에 초점을 맞춰서 관련성이 낮은 사업으로 무리한 확장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불필요한 자산은 적절하게 정리하고, 수익성 좋은 사업에 적극적으로 재투자하며, 재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은 현금은 주주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이러한 효율적인 자본 배치는 좋은 기업 거버넌스에서 싹틀 수 있다. 독단적 의사결정이 아닌 적절한 견제가 이루어질 수 있는 이사회가 필요한 이유다. 그리고 이러한 거버넌스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사회가 주주의 이익을 위해 충실하게 일할 수 있는 법적, 경제적 인센티브가 구축돼야 한다. 이것이 밸류업과 관련된 법 개정 논의의 주요 맥락이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 빠진 게 있다. 바로 투자자의 역할이다. 밸류업 논의에서 투자자는 주로 밸류업의 수혜를 입는 대상자로만 여겨진다. 물론 가장 직접적인 수혜자인 것은 맞다. 하지만 투자자는 밸류업의 수혜자인 동시에 밸류업의 성공을 위한 필수적인 존재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착한 일을 지속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외부 이해관계자, 특히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투자자들의 적절한 견제와 감시는 효율적인 자본 배치가 지속될 수 있게끔 하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시작된 스튜어드십 코드 개편 논의는 아주 시의적절하다. 2월 초 금융위원회가 한국ESG기준원과 함께 주최한 ‘스튜어드십 코드 발전방향 세미나’가 열렸다. 이 세미나에서 논의된 발전 방향의 핵심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스튜어드십 코드의 이행력 제고’라고 볼 수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투자자의 코드 이행 내역을 점검하고 평가하여, 밸류업 과정에서 투자자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자들이 주주로서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여 투자 대상기업의 의사결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감시하고 견제하도록 하는 자발적인 행동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기관투자자가 기업의 의사결정을 견제하지 못하는 것이 금융위기의 원인 중 하나라고 진단한 후 2010년 영국에서 최초로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됐고, 이후 일본, 싱가포르, 네덜란드, 캐나다, 브라질, 인도 등에서도 그 뒤를 밟았다. 국내에서는 2018년 최초로 도입하였고, 현재 약 240개 기관이 스튜어드십 코드에 참여하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 원조 국가인 영국에서는 투자자가 스튜어드십 코드에 서명을 한 이후에 지속적으로 점검한다는 점이 국내의 스튜어드십 코드와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다. 코드에 서명을 한 기관은 1년간 스튜어드십 코드 활동을 어떻게 했는지 면밀히 보고하고, 그에 따라 평가받는다. 평가 결과 기준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에는 몇 차례 경고 이후 코드를 박탈할 수도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 이제 한 발짝 더 내디딜 때
스튜어드십 코드를 충실히 이행한다는 것은 크게 보면 주주총회에서 충실한 의결권 행사와 주주관여활동,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주주관여활동이라 함은 기업과 직접 소통하며 기업의 의사결정을 점검하고 견제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우리가 언론에서 보는 경영권 분쟁과 같은 공격적인 방식부터 비공개로 조용히 보내는 서한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2018년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후 눈에 보이는 것보다 많은 성과가 있었다. 한국 ESG기준원의 자료에 따르면 국내 자산운용사의 의결권 행사의 양과 질이 모두 개선됐다. 더 많은 피투자기업을 대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안건에 반대하는 비율도 더 높아졌다. 그리고 자산운용사의 주주관여활동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이러한 개선이 시장 참여자들에게 피부로 와닿지는 않는 듯하다. 한 발 더 내디딜 때가 된 것이다. 투자자의 적극적인 관여는 기업의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하도록 하는 핵심 토대 중 하나인 만큼 투자자의 역할 강화가 없이는 밸류업이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없다. 금융위가 시작한 스튜어드십 코드 발전 방향에 대한 논의가 반가운 이유다.
☞ 박세원 팀장은
박세원 팀장은 국내 ESG리서치 기관에서 ESG리서치 및 의결권행사 등의 업무를 수행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50조원의 자산을 운용하는 종합자산운용사인 키움투자자산운용에서 ESG전담부서를 맡아 ESG 투자 관련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자체적인 ESG평가 모형을 비롯한 ESG리서치 프레임워크를 구축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운용부서와 협력하여 ESG요소를 투자 프로세스에 통합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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