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아 미안해’ 캠페인을 보면서 답답함을 많이 느낀다. 몇 년 전과 똑 같은 데자뷔 현상 때문이다. 지금은 정인이지만, 그때는 ‘서현이’였다. 2013년 12월, 갈비뼈 24개 중 16개가 부러진 채로 사망한 ‘울주 서현이 사건’으로 한국 사회가 분노로 들끓었다. 아이를 살릴 기회가 최소 몇 번 있었다는 이야기, 아동학대 예방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야기는 그때도 똑같이 반복됐다. 1년 넘게 국회에서 잠자고 있던 ‘아동학대 특례법’은 아이의 사망을 계기로 재빠르게 국회를 통과했고, 우리 정부는 범부처 차원의 ‘아동학대 예방 및 피해아동 조기발견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대통령만 바뀌었지, 화면을 7년 전으로 옮겨 놓은 듯 똑같다.
가해자를 살인죄로 처벌하는 데서 멈추면, 우리 사회는 제2의 정인이 사태를 또 맞게 돼있다. 왜? 방패로는 창을 막을 수 없으니까. 조선일보 공익섹션 ‘더나은미래’ 편집장 시절, 아동학대 이슈에 큰 관심을 갖고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보도했었다. 문제가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핵심은 ‘정치의 실패’라고 생각한다. 20년 동안 아동학대 현장을 지킨 전문가는 “선거철이면 ‘350억 다목적○○센터 유치’ 이런 플래카드 붙은 걸 보면 씁쓸하다”고 했었다. 노인정의 보일러 예산은 척척 집행되지만, 표가 없는 아동학대 예방 예산에는 돈이 안 간다.
우리나라는 각 부처마다 산하조직이 정말 많은데, 예를 들어 여성가족부는 ‘건강가정지원센터’ 혹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복지부는 ‘지역아동센터’, 고용노동부는 ‘고용복지센터’ 등등 그물망처럼 빽빽하다. 이런 센터들은 대부분 기초 지자체 숫자만큼 존재하는데, 대개 220곳 남짓 된다. 한데, 아동학대를 담당하는 아동보호전문기관은 지금까지 민간NGO가 담당해오고 있으며, 60곳 남짓한 이곳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20대 초중반의 신입들이다. 학대 부모로부터 협박과 욕설은 기본이고, 죽이겠다며 칼을 들고 사무실을 찾는 이도 있다. 아동학대 신고를 받으면 경찰과 함께 출동해야 하지만, 아동보호전문기관 숫자가 부족하다보니 한곳이 경찰 50곳을 커버하기도 한다. '공권력이라 좀 나을 것 같았던' 경찰관들은 수시로 보직이 바뀐다. 아동학대를 판단하는 전문성도 부족하고, 부모로부터 소송의 위협을 당하기도 해 다들 소극적으로 아동학대를 판정한다.
이것은 분명 국가의 실패, 공공의 실패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국가는 시장 실패를 해소하기 위해 직접 서비스를 공급하거나 규제하는 방법을 쓴다는데, 국가의 실패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거꾸로 시장이 나서서, 아동학대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사회책임투자의 선구자인 에이미 도미니가 쓴 <사회책임투자>라는 책에 보면, 그녀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사회책임투자’라고 설명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 문제에 분노해서, 1980년대 중반 대학교, 종교단체, 연기금들은 남아공에서 사업을 하는 미국 기업들의 주식을 처분했고, 1986년에는 미국, 유럽, 영국연방 등이 무역제재와 신규투자금지까지 가세하자 결국 남아공 사업주의 75%를 대변하는 사업자단체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폐지를 요구하는 기업헌장을 작성한 것으로 나온다. 이러한 흐름은 결국 추후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권좌에서 밀려나게 한다. 분노한 자금(money)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1989년 미국 원유 운반선 엑손 발데즈가 알래스카의 암초에 충돌해 이틀 동안 무려 26만 배럴의 원유가 쏟아진, 미국 역사상 최악의 원유유출사고가 발생했는데, 이는 이후 기업의 환경적,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인식한 ‘세레즈 원칙’을 만들었고 ‘GRI(Global Reporting Initiative)’를 탄생시킨 계기가 된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례가 나오면, 조금씩 시스템은 바뀐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분유 유통기준을 만든 사례를 보자. 자선수녀회(Sisters of Mercy) 등 가톨릭단체들이 제3세계 빈민을 위해 일하는 와중에 자꾸 아기들이 죽어가는 것을 이상하게 보았던 점이 시작이었다. 원인은 분유였다. 분유회사들은 처음에 산모들에게 분유를 공짜로 공급했고, 순진한 엄마들은 모유보다 분유가 더 건강에 좋다고 생각해 분유를 먹였다. 젖은 말라버려 모유를 먹이고 싶어도 못 먹였다. 그 결과 제3세계 엄마들은 비싼 분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분유는 물과 섞어야 하는데, 비싼 분유값 때문에 엄마들은 분유에 물을 너무 많이 섞어서 아이들은 영양 결핍에 시달렸다. 게다가 더러운 물에 분유를 타서, 콜레라로 인한 아동 사망률이 높았던 것이다. 스위스 네슬레 제품에 대한 대대적인 불매운동이 벌어졌고, 책임투자자들은 미국에 본사를 둔 다른 분유회사에도 같은 문제 제기를 한 이후 결국 분유 유통기준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사건들은 제3세계 공급망의 환경적 책임성, 제품 안전성, 인권 등 다양한 문제제기로 이어졌고 ESG 이슈에서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최근 해외 언론에선 ‘톱 글로브(Top Glove)’에 관한 ESG 이슈가 등장했다. 세계 최대 의료용 장갑 제조업체인 말레이시아의 ‘톱 글로브’는 코로나19 덕에 순이익이 급증한 곳이다. 2020년 2분기 순이익만 8140만달러(980억원)으로, 전년 대비 366% 급증했으며, 주가도 255% 상승했다. 애널리스트들은 톱 글로브의 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며 적극 매수를 제안하기도 했다. 한데 지난해 11월 말 의외의 보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톱 글로브 공장에서 2500여명에 달하는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감염자들 중 80% 이상은 네팔 등에서 온 이주노동자로, 대부분 비좁은 숙소에 거주하면서 하루 12시간 2교대로 주6일간 일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톱 글로브의 말레이시아 내 41개 공장 중 28개가 일시적으로 폐쇄됐다.
새해 들어 톱 글로브는 또 한번 이슈가 되었는데, ‘블랙록’과 ‘노르웨이 국부펀드(NBIM)’가 이사 재선임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블랙록은 투표 게시판을 통해 “톱 글로브 직원 중 5000명 이상(인력의 25%)이 코로나19에 감염됐으며 1명이 사망했다”며 “이러한 사건은 이사회가 주주들에게 전달된 정보와 현저히 다르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톱 글로브는 지난 10월 내부고발자가 노동자의 현장 사진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해고되기도 했다. 이곳은 2018년 유엔글로벌콤팩트 감시대상에 추가된 곳이기도 하다. 블랙록은 “상황의 중대성과 이사회의 감독 실패를 감안할 때, 현 이사회 이사들의 재선임에 반대표를 던진다”고 밝혔다. 2021년에도 ESG와 관련된 기업 이슈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기업의 책임에 관한 투자자들과 소비자들의 눈초리는 앞으로 더욱 매서워질 지도 모른다.
연초부터 쏟아지는 국내의 ESG 경영 뉴스를 보니, 정신이 좀 아찔하다. “늦었어도 앞서가자”며 새마을정신으로 달리는 건 좋은데,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 것일까. ‘윤리’와 ‘사회책임’이라는 용어보다 ‘전략’과 ‘혁신’이라는 용어를 더 좋아하는 우리나라의 경영 및 투자 환경에서, 자본(투자)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해본 역사의 뿌리는 얕다.
살아보니, 시스템은 별 게 아니다. 제 아무리 좋은 선진국 최첨단 제도를 장착해 놓아도, 문화(그 사회 내부구성원들의 집단적인 마인드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가 바뀌지 않으면, 그 시스템은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아동학대를 막기 위한 시스템은 부족하긴 해도, 지금도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우리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할 뿐이다. 2021년, ESG가 무엇인지 진짜 본질을 끊임없이 고민하지 않으면, ESG 유행 따라 또 세월을 낭비하게 된다. 또하나의 무역장벽이든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의 차이든, 미국과 유럽 등은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나가 있다. 장벽을 뛰어넘는 건 결국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에 걸맞는 우리의 ‘품격’일 것이다. '우리 회사는 정말 좋은 회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2021년이 되었으면 한다.
※ 독자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창간 1년도 안 된 <임팩트온>은 월 방문자수 1만명을 넘기며, 사랑받고 있습니다. 2021년에도 좋은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궁금한 점, 지적할 점, 제안할 점이 있으면 언제든 이메일(admin@impacton.net)으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