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와 달리, 국내에는 ESG 및 지속가능경영에 관한 전문 미디어가 없다. ESG(지속가능경영) 전문 미디어를 해보겠다며 ‘임팩트온’을 준비하고 홈페이지를 오픈한 지 3개월 가량 된다. 매일 국내외 뉴스 클리핑을 통해 ESG 관련 기사를 리뷰하는데, 마치 ‘요술을 부린 듯’ ESG 관련 언론보도가 쏟아진다. 박근혜 정부 초창기였던 2013년이 연상될 정도다. 당시 경제민주화와 함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용어는 언론에 줄기차게 등장했고, 재계 총수들의 신년사에 빠짐없이 이 용어가 강조되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영어로 바꾸면, ‘CSR’이 된다. 그런데 원래 규정하는 CSR이라는 용어를 들여다보면, “기업의 경제적 책임(이윤 극대화), 법적 책임(법과 규제 준수), 윤리적 책임(윤리적 기준 준수), 자선적 책임(지역 사회공헌)을 다하는 것”(Carroll, 1991), “조직이 경제, 사회, 환경문제를 사람, 지역, 공동체 및 사회에 혜택을 줄 수 있는 목적으로 다루기 위한 균형 잡힌 접근 방법”(국제표준화기구, ISO), “기업과 사회와의 공생관계를 성숙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기업이 취하는 행동”(OECD) 등을 들 수 있다. 결국 CSR은 직접적인 이해관계자(주주, 경영진, 고객, 종업원, 협력업체) 및 간접적인 이해관계자(정부, 지역사회, 언론, NGO 등)에 대해 기업의 책임을 다하는 이해관계자 기반 경영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CSR은 사회공헌?
그런데 그동안 국내에서 이 CSR이라는 용어의 정의는 ‘사회공헌’으로 통용되어왔다. 조직이름은 CSR팀이었지만, 하는 업무는 기업의 사회공헌 자금을 집행하면서 정부 혹은 비영리단체와 함께 사업을 추진하는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지속가능경영팀이라는 조직명을 지닌 기업에서는 사회공헌 업무에 지속가능보고서를 발간하면서 환경부문을 챙기거나, 동반성장(협력업체와의 상생)을 챙기는 경우가 다수였다. 그러다 마이클 포터 교수가 CSV(공유가치 창출)를 주창하면서, 우리나라 기업 CEO들은 “비즈니스 활동을 하면서 사회적 가치도 만들어낼 수 있는 CSV가 답이다”라면서 너도나도 CSV로 달려갔다.
이 현상의 이면에는, 할 수 있으면 최대한 경제적 책임(이윤 극대화와 고용 창출)만 지고 싶어하는 기업들의 심리가 들어있었다. 아마 일부 CEO들은 이렇게 말했을 지 모른다. “뭐? 이걸 다 어떻게 해? 사업하지 말라는 소리나 다름없네. 그냥 사회공헌 하고 좀 뭉개면 안되나?” 하고. CSR을 하려면 갈 길도 너무 멀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잘한다고 사회에서 칭찬해주지도 않는다. 사회공헌을 하면 칭찬이라도 받는데 말이다.
환경재단, 조선일보 공익섹션 더나은미래 등에서 10년 동안 현장을 지켜보면서, 기업에 CSR을 내재화하는 게 무척 힘드는 일이라는 걸 체감했다. 더나은미래 편집장 당시였던 2015년부터 ‘아시아 CSR랭킹위원회’를 꾸려서, 고려대 이재혁 교수팀과 함께 한중일 3국 기업 50개의 ESG(환경ㆍ사회ㆍ지배구조) 항목별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랭킹을 매기고 발표를 했다. 기업들의 반응은 2가지였다. 저항하거나 외면하거나.
해외발 ESG 태풍, 우리 기업의 대응은?
그런데 갑자기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난 걸까. 왜 갑자기 ESG가 구름처럼 몰려오는 것일까. 사실 따지고보면, ESG나 CSR이나 내용상 큰 차이는 없다. 온실가스 덜 내뿜고 쓰레기 덜 만드는 것(환경), 혹은 직원들의 안전을 고려하고 협력업체를 공정하게 대하는 것(사회), 주주 권리를 보장하고 이사회를 통해 기업활동을 제대로 모니터링하는 것(지배구조) 등 ESG도 결국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 외에 수면 아래에 있는 몇 개의 조짐을 발견했다. 우선 ESG는 해외발(發), 특히 유럽발 태풍이다. 안 그래도 환경과 기후변화에 민감한 유럽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용어는 ‘리질리언스(Resilience)’라는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회복탄력성이다. 왜 이 용어인가. 우리 몸을 생각하면 쉽다. 술 먹고 난 다음날 멀쩡한 건 간의 회복탄력성 때문인데, 간만 믿고 술을 너무 많이 계속 먹으면 결국 몸에 탈이 난다. 간이 회복 불가능하다. 우리 몸처럼 지구도 비슷하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주구장창 탄소를 꺼내 쓰고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쓰레기를 버려 대도, 지금까지는 지구의 회복탄력성이 버텨줬다. 하지만 곧 임계점이 지난다는 공감대가 유럽에선 파다하게 퍼져 있다. 그걸 막기 위한 신념으로, 유럽에선 지금과 같은 ESG, 특히 환경 이슈에 대해 강력한 정책을 펴고, 이는 투자와 기업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나 기업에선 이런 신념의 수준까지는 아직 가지 못한 듯 하다.
다음은 ESG에 대한 우리 기업의 대응이다. 빠른 기업은 재빨리 공수태세를 전환하고, 중간 기업은 ‘뭔가 있나 보다’ 하고 따라가려고 촉을 세우고 있고, 느린 기업은 아직 방어적이다. 예를 들어, 블랙록이 아무리 “지속가능성 투자 늘린다”고 난리 쳐도, 해외 지분이 없고 대주주 지분이 많은 국내 대기업의 경우 ESG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주주총회에서 아직 “왜 ESG 안 하냐”는 호통보다, “왜 이리 실적 안 좋냐”는 호통이 더 많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빠른 기업은 밸류체인(공급망) 상 해외에 수출하는 국내 협력업체들이다. 재생에너지 비율을 맞추라고 요구하고, 석탄발전 멈추라고 요구하고, 지속가능보고서 항목을 구체적으로 따져가며 물어보니까, 당장 변화를 체감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데이터 기술이 발달하고 각종 외부데이터를 구하기 쉽게 되면서, 기업은 외부의 ESG 평가에 맨몸으로 노출되고, ESG 이슈를 총체적으로 관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아직 ESG에 대해 잘 모르는 기업에서는 언론에 ‘ESG 경영’이라고 하면서, 사회공헌 자료를 릴리즈하기도 한다. 이는 ‘CSR’을 ‘사회공헌’이라고 했던 것과 똑 같은 패턴이다. 또 하나의 패턴이 ‘ESG 평가’에서 우리가 A등급을 받았다고 홍보하는 것이다. B등급을 받은 담당자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당장 B등급을 A등급으로 올리기 위해 무리수를 둘 수도 있다. 평가 혹은 등급은 양날의 검이다. 외부 평가 덕분에 조직 내부의 상태를 점검하고 개선해 나가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지만, 때로 ‘등수’에 민감한 기업 입장에서는 경쟁기업보다 더 나은 등급을 못 받으면 아예 ESG 자체를 등한시해버릴 수도 있다.
기업이 ESG 경영을 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그럼 왜 ESG를 해야 할까. ESG를 잘 해야 기업한테 좋으니까? ‘ESG를 잘해야 기업한테 좋다’는 걸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ESG를 잘하면 기업한테 좋은 것은 과연 증명이 될까. 2000개 기업의 데이터를 분석해봤더니 ‘ESG 잘하니 기업 실적 좋더라’는 논문이 나왔다고 한들, 기업 회장님 혹은 CEO들이 반응을 할까. ESG와 기업실적은 트레이드오프(trade-off) 될 만한 것일까. 쉽지 않은 문제다.
ESG 안 하면 정부와 투자자, 소비자, 언론한테 혼나니까? 지금 현재는 이 단계인 것 같다. 평판이 중요한 기업 입장에서, 평판은 곧 기업 가치와 직결되니까.
최근 한 모임에서 만난 부사장이 이렇게 말했다. “다른 논리는 없고, ESG 하면 좋잖아. 좋은 기업 되는 게 뭐가 나빠” 라고. 무릎을 쳤다. 기후변화와 순환경제, 자본주의와 불평등 등의 개념을 알고 나면, 기업은 사회가 왜 ESG를 요구하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산업혁명 이후 벌어졌던 기업과 사회의 갭(Gap)을 메우고 있고, 그 용어가 바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다.
29일 SK 최태원 회장이 주최한 VBA(Value Balancing Alliance)에서, 최 회장은 “ESG가 기업 경영의 새로운 규칙”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아주 오랜 시간 사회적 가치(Social Value)에 대한 고민을 해온 몇 안 되는 재계 인사다. 국내 기업 오너와 회장들이 ESG에 대해 ‘흘려 듣기’ 대신, ‘주의 깊게 듣기’를 한번 해볼 것을 제안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