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겁이 난다. 댓글에 “작작 좀 해라” “모자란 것들이 설친다” 등의 무조건적인 비판이 많이 달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꾸 목소리를 내는 건 여성 후배들, 가까이는 두 딸들 때문이다. 적어도 후배들과 딸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지금보다는 반 뼘만큼은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할까.
박완서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책을 좋아했는데, 사회초년병 시절 그책 제목을 인용해 ‘그 많던 여직원은 어디로 다 사라졌을까’라는 책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대기업은 물론이고, 언론사에도 여성 선배들을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을까. 지난 6월말 기준, 우리나라 코스피에 상장된 기업의 전체 임원(비등기) 대비 여성임원을 조사해보니, 1만2059명 중에 554명이었다. 4.6%였다. 지난해말에 3.4%였는데 1.2%p 늘어났다. 30%에 달하는 글로벌 기업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줄어들지 않고 늘어난 것이 감사할 뿐이다. 정말 흥미로운 점은, 상장사 전체 임원이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무려 5274명이나 줄었는데, 여성임원들은 42명만 줄어들어 감소폭이 적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남성임원보다 여성임원이 경쟁력이 높아서일까, 아니면 아무래도 소수인 여성임원에 비해 다수인 남성임원이 감원대상이 될 확률이 높으니 역차별인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여성이사의 비율도 비슷하다. 전체 이사진 4546명 중 159명으로, 3.5%를 차지했다. 작년 말에 2.7%였는데 0.8%p 늘었다. 상장사 전체 이사 숫자 또한 639명이나 줄었는데, 여성 이사의 숫자는 오히려 19명 늘었다. 분명한 건, 기업 임원과 이사진의 성별 다양성을 고려하는 시대적 흐름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코스피 상장사 100대 기업 중 여성임원이 10명 넘는 기업은 아모레퍼시픽(14명/60명), CJ제일제당(17명/81명), 네이버(16명/99명), 삼성전자(50명/1045명) 등 4곳이다. 반면, 여성임원이 한 명도 없는 기업은 30곳이다(카카오, 한전KPS, 강원랜드 등 3곳은 비등기임원 숫자 공개 않아서 제외함). SK하이닉스는 임원 188명 중 여성임원이 한명도 없고, 현대모비스는 89명 중 0명, DB손해보험은 54명 중 0명, 현대제철은 75명 중 0명, 한화솔루션은 81명 중 0명, 삼성엔지니어링은 59명 중 0명이다. 200명 가까운 임원 중 단 한명의 여성임원이 없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편, 코스피 상장사 100대 기업 중 여성이사가 한 명이라도 있는 기업은 37곳으로 나타났다. 여성이사가 2명인 기업은 카카오(2명/7명), S-OIL(2명/11명), 삼성카드(2명/7명), KB금융(2명/9명), 삼성전자(2명/11명), 한국전력(2명/14명) 등 6곳이었다. 여성이사가 단 한 명도 없는 회사는 63곳이었다. 특히 여성임원과 이사가 한 명도 없는 기업은 22곳이었다. 주로 현대모비스, 현대글로비스, 현대건설, 현대중공업, 현대제철 등 현대 계열사들이 많았다. '현대 계열사에 신규 취업하는 여성들이라면, 이 수치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사실 이번 조사에서 여성직원 비율 대비 여성임원 비율을 보지는 못했다. 아마 여성직원에 비해 여성임원 수는 턱없이 적을 것이다. 이런 자료를 신입여직원들이 본다면, 어떨까? ‘아! 나는 아무리 해도 이 회사에서 비전을 찾지 못하겠구나’ 싶지 않을까.
애써 남녀차별 없이 직원을 뽑았어도, 여성직원 중 유능한 직원들이 빠져나가면 그건 기업의 손실이다. 물론 여성들의 경우 결혼, 출산, 육아 등을 겪으면서 일시적으로 남성들에 비해 업무집중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선진국에서 여성 임원비율이 30%가 넘는 이유는 유연한 근무환경과 다양한 시스템이 여성을 일터 바깥으로 쫓아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두 번의 경력단절을 겪은 후, 다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과정들을 개인한테만 겪게 내버려두는 건 사회적인 손실이요, 한편에선 너무나 불공정한 운동장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워킹맘 한명이 일을 계속하는 건, 어쩌면 그 사회의 안전망 같은 걸 보여주는 지표일지도 모른다. 유연한 기업조직문화, 돌봄시스템이 갖춰진 교육과 복지, 가족 및 커뮤니티의 지원, 가정 내 남녀 분업과 인식 등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그 중 하나만 무너져도 워킹맘은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여성임원이 한 명도 없는 기업들이라면 ‘우리 회사에서 여성 임원 한 명만이라도 배출하자’는 목표를 가져줬으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우리 회사가 왜 여성들의 무덤이 되었는지, 그게 과연 남성들한테는 도움이 되는 건지 자연스럽게 문제가 드러나고, 조직문화가 바뀌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