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천연가스가 연일 ‘대란’ 사태를 낳고 있다. 불과 몇 달 전 ‘핏포55(Fit for 55)’ 공약으로 “전 세계 최초의 탄소중립 대륙이 되겠다”면서 2035년 내연기관차 금지와 난방과 교통에까지 탄소세 부과를 약속하던 유럽연합이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임팩트온>은 블룸버그, FT, 로이터 등에 등장한 유럽발 천연가스 대란을 5가지로 나눠 정리해봤다.
1. 천연가스 사태는 우연인가, 필연인가
우연이 겹친 필연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유럽 천연가스 가격은 2020년 말과 비교하면 3배 가까이 올랐다. 유럽 가스가격 지표인 네덜란드 TTF는 지난달 말 메가와트(MWh)당 50유로(약 6만9000원)를 넘었다. 한때 70유로까지 오르기도 했다.
이유는 복합적이다. 일단 수요가 늘었다.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선 가뭄으로 수력발전 가동이 줄어들면서 천연가스 수요가 늘었고, 유럽에선 코로나 19가 회복되면서 글로벌 공급망과 수요가 살아났다.
그런데 공급은 부족했다. 지난해 겨울 이례적으로 추웠던 유럽에선 난방소비가 급증하는 바람에 가스 저장량이 적었다. 비축된 가스도 부족한데, 유럽 천연가스의 3분의 1 이상을 공급하는 러시아가 공급을 줄였다. 러시아가 겨울을 예상해 천연가스 비축량을 보충했다는 주장부터, 유럽 규제당국으로부터 천연가스 송유관인 ‘노드스트림2’의 승인을 얻기 위해 압박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다양하게 나온다. 노드스트림2는 러시아에서 발트해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송유관이다. 한마디로 ‘러시아의 유럽 길들이기’라는 것이다.
재생에너지마저 도와주지 않았다. 북해 풍속이 최근 20년만에 가장 느려지면서 발전량이 급감했다. 석탄 발전을 할 수도 없었다. 탈석탄 정책이 추진되면서, 석탄발전은 이제 유럽에서 거의 퇴출되는 분위기다. 천연가스는 유럽 전체 전력의 23%를 차지한다.
유럽에서 천연가스 현물가격이 40% 넘게 오르자, 아시아와 중남미 바이어까지 나서서 비싸게 값을 매기는 바람에 공급은 더더욱 쪼그라들었다.
2. 왜 영국이 가장 큰 난리인가
영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마치 전쟁을 방불케한다. 영국 상황은 브렉시트까지 겹치면서 더욱 꼬인 케이스다. 유럽 전체 전력 생산에서 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38% 가량인데, 이중 풍력이 10% 남짓이고 대부분 태양광이 많다. 반면, 북해를 끼고 있는 영국은 해상풍력 강국이다. 영국은 전체 전력공급에서 천연가스가 38.4%, 풍력은 24% 가량을 차지한다(2019년 기준).
북해의 바람이 잦아든 원인은 분명치 않지만, 풍력 발전이 줄어들면서 전기요금은 1년만에 7배나 올랐다. 영국에서는 소규모 전력회사들이 파산했고, 전력 집약적인 공장들이 문을 닫기도 했다. 천연가스에 대한 수요가 몰려들면서, 가격은 오르자 주유소에서는 연료 ‘패닉 바잉’ 대열까지 나타났다. 영국 정부는 공황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군부대까지 대기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게다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음식부터 연료까지 공급망의 요청은 늘어났으나, 브렉시트 이후 화물차 운전자들이 부족해지면서 수요-공급 미스매치는 더욱 심해졌다. 급기야 영국정부는 23일(현지시각) “외국인 화물차 운전자 5000명에 대한 임시비자를 발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영국은 원자력 발전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영국 정부는 롤스로이스 컨소시엄의 소형모듈원자로(SMR) 사업 지원을 승인할 예정이다. 영국 내 7개 원전은 17%를 차지하는데, 애초 2024년까지 석탄발전소를 모두 폐쇄하겠다고 했으나, 이달부터 노후 석탄발전소를 재가동했다. 석유전문매체 오일프라이스닷컴에 따르면, 이달 영국의 석탄발전 비중은 지난해 대비 2배 넘게 뛰었다. 지난 24일 영국 더 타임즈는 “영국이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함께 웨일즈 앵글시섬에 새로운 원전 건설을 논의중”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3. 미국은 왜 러시아를 공격했을까
미국과 국제에너지기구는 “러시아가 유럽의 가스 수출을 확대해야 한다”고 러시아를 이번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미국 에너지부 장관인 제니퍼 그랜홈은 “가격 조작 혐의를 받고 있는 공급 국가에 대항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이번 기회를 유럽 천연가스 공급망의 '탈러시아화' 기회로 보고 있다.
FT는 “미국 LNG 수출업체들이 유럽의 천연가스 부족을 활용할 프로젝트를 계획중”이라는 보도를 27일(현지시각) 내놓았다. 미국 걸프만 연안에 150억 달러 규모의 수출공장을 짓기를 희망하는 ‘텔루리안(Tellurian) LNG’ 채리프 수치(Charif Souki) 회장은 FT 인터뷰에서 “이는 미국 LNG산업에 좋은 일”이라며 “인프라가 미국에 건설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LNG업체들은 새로운 LNG공장을 짓는다면 미국이 호주에 이어 세계 2위의 액화천연가스 수출국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러시아로부터의 에너지 공급망을 탈피하고, 미국 LNG 수출 증가를 주장해온 미국 정부 또한 향후 청정연료로의 전환이 속도를 낼 때까지 유럽에 LNG 공급을 늘릴 것을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바이든 정부가 이를 승인할지가 관건이다. 바이든 정부는 탈탄소화 정책에 따라 천연가스 수요 또한 장기적으로는 줄여나가는 전략을 쓰고 있다. 또다른 LNG개발업체인 벤처글로벌(Venture Global)의 마이크 사벨 대표는 “미국의 LNG는 유럽과 그 너머의 에너지 안보에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4. 유럽의 에너지 위기는 탄소중립 정책을 약화시킬까
이번 에너지 위기와 ‘탄소중립 정책’을 연계하는 부류와 연계를 이에 반발하는 부류가 등장하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치솟는 전기요금이 1면 뉴스를 장식하고, 정부 반대 시위를 촉발시켰다. 파스칼 캉팽 EU 환경위원회 위원장은 “난방 탄소세는 상업 건물에만 적용하고, 유류 탄소세 대신 자동차 업계 배출가스 규제를 강화하자”고 ‘핏포55’에 대한 반대의견을 표시했다. 핏포 55에는 건물 난방과 교통 분야를 탄소배출권 거래제(ETF)에 포함하는 방안이 담겨있는데, 이렇게 되면 유류에 톤당 50유로(약 6만9000원)의 탄소세를 부과해야 한다. 프랑스에서는 2018년 유류세 인상에 반발해 벌어졌던 대규모 시위인 ‘노란조끼’ 시위의 두려움이 남아 있다.
EU 집행위원회에서는 '핏포55' 수정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전기요금 인상으로 표심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며,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유럽연합 에너지장관들은 22일(현지시각) 에너지 급등에 따른 긴급 지원문제를 논의했다. 프랑스는 지난주 저소득층 550만 가구에 연간 150유로(20만원) 지원 계획을 발표했고, 이탈리아 등도 지원책을 검토하고 있다. 영국도 에너지 기업에 긴급 자금 대출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리스 총리는 예상 전력요금 폭등을 대부분 커버하는 것을 목표로 모든 가구에 4분기 전력보조금을 지급하겠다고 공약했다. 네덜란드는 기업과 가계의 에너지 비용을 낮추기 위해 5억유로의 국가예산을 포함시켰다. 스페인은 전력회사에 ‘횡재세’를 부과하고, 소비자의 에너지 요금을 인하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스페인 전력회사인 이베르드롤라 이그나시오 갈란 CEO는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이 방법은 지속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에너지 전환 전체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5.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일단 긴급한 불은 끈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가즈프롬은 26일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늘릴 준비가 돼있다고 크렘린궁 대변인을 통해 발표했다. 풍력 또한 회복되고, 천연가스 공급이 늘어나면서 가격도 서서히 내려가고 있다.
하지만 진짜 대란은 이제부터 시작일지 모른다는 분석도 나온다. 에너지 분석기관 더퓨즈(THE FUSE)는 “분석가들은 2022년 에너지 대란과 함께 세계가 석유대란에 직면할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세계 최대 석유회사들이 불확실한 미래 수요로 인해, 생산을 줄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 퓨즈는 “2014-2016년 추락이후 역사적으로 낮은 석유가격, 석유수출국기구(OPEC, 2022년 9월 종료) 내 생산국들의 감산을 강제할 만큼 지속적인 공급 과잉, 화석연료에서 벗어나 에너지 전환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 등이 맞물려 생산 지출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석유뿐 아니라 석탄까지 줄어든다. 중국이 해외 신규 석탄프로젝트에 관한 모든 투자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고, 미국도 석탄 소비의 급격한 감소로 천연가스는 석탄의 공백을 빠르게 메워가고 있다. 로얄더치쉘은 2030년까지 수요에 맞추기 위해 LNG 신규투자로 2000억 달러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메린 서머셋 웹 머니위크 편집장은 FT 기고를 통해 “에너지 전환은 화석연료에 대한 장기적인 의존을 수반하기 때문에, ESG 흐름에 따라 정유회사 주식에서 손을 떼라고 강요하고, 규제를 통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막고, 높은 자본조달 비용으로 이어짐으로써 화석연료를 악마화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며 “대신 우리는 재생에너지가 주도하는 미래의 기술적인 과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화석연료 추출 작업이 보다 깨끗하고 효율적이로 이뤄지도록 만드는데 초점을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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