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다녀왔다. 한국 건설사가 시공에 참여한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쿠알라룸푸르의 명동이라 불리는 부킷 빈탕(Bukit Bintang), 분수 쇼로 유명한 KLCC 공원, 매력적인 야식이 가득한 잘란 알로 (Jalan Alor) 등 쿠알라룸푸르의 곳곳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특히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를 바로 눈앞에서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루프톱 바 ‘마리니스 온 57(Marini's on 57)’에서 만끽했던 감정은 당분간 쉬이 잊히지 않을 듯하다.
쿠알라룸푸르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보니, ‘아테네 이후 가장 놀라운 도시 국가’로 평가받는 이웃 국가 싱가포르 못지않게 ‘그린 빌딩’이 많이 보였다. 오피스, 리테일의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쿠알라룸푸르의 상업용 부동산 시장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컸다. 또 여러 공간을 들르며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서도 ESG 물결이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말레이시아 부동산 시장에서도 유효한 현상 ‘그린 프리미엄’
이번 칼럼에서는 말레이시아의 상업용 부동산 시장에서 불고 있는 ESG 바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글로벌 부동산 컨설팅 기업 나이트프랭크의 말레이시아 법인(Knight Frank Malaysia, 이하 ‘나이트프랭크’)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할 이상이 말레이시아에서 기업의 부동산 전략을 수립할 때 ESG 고려사항(ESG considerations)이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답했다.
또 약 80%의 응답자가 ‘ESG 기능(ESG features)’이 업무 공간 선호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린 프리미엄(green premium) 및 브라운 디스카운트(brown discount)가 말레이시아 부동산 시장에서도 유효한 것이다. 선호하는 그린 오피스 기능으로는 에너지 효율 기술, 건물의 지속가능성 등급 및 인증, 빌딩 관리 및 웰니스(Wellness), 폐기물 관리, 물 절약 기술, 탄소 관리 및 데이터 추적, 친환경 운송 등이 꼽혔다.
지속 가능한 디자인 원칙을 반영한 말레이시아의 실물 부동산 자산 사례
실제로 ‘ESG DNA’가 깃든 말레이시아의 주요 부동산 자산을 들여다보자. 먼저 말레이시아 국영전력공사(Tenaga Nasional Berhad, 이하 ‘TNB’)의 플래티넘 캠퍼스다. 2022년에 완공된 이 캠퍼스에는 오피스 타워, 컨벤션 센터, 보육시설, 센트럴 플라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환경을 고려한 지속 가능한 디자인 원칙을 사이트 개발의 주요한 원칙으로 내세웠다. 녹색 지붕, 방사율이 낮은 이중 유리 파사드, 빗물 집수(harvesting), 첨단 조명 제어, 중수(grey water) 재활용 시스템 등이 이 원칙을 고수하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다. 열과 소음을 제어하고 자연 채광을 활용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현지에서 조달한 친환경 자재를 사용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완공되면 세계에서 2번째로 높은 건축물이 되는 말레이시아 국영연금공단(Permodalan Nasional Berhad, PNB) 건물 ‘메르데카 118(Merdeka 118)’은 지속 가능하고 사람 중심적(people-centric)인 사무 공간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쾌적한 오피스 실내 환경 구축을 위해 공기 필터 및 수질 감사, 눈부심 조절까지 신경을 쓰고자 한다. 임차인 웰빙뿐 아니라 주변 커뮤니티와의 조화도 중시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말레이시아 사바(Sabah) 주(州)에 위치한 오피스 타워인 플라자 셸(Plaza Shell)은 임직원들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수유, 요가, 명상을 위한 전용 공간을 마련했다. 쿠알라룸푸르 소재 오피스 타워이자 복합시설인 메나라 웰드(Menara Weld)는 에너지 절약형 조명 시스템 설치와 공조 시스템 업그레이드 등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공사를 거쳐 38% 이상의 에너지 절감 효과를 거두었다. 메나라 AIA 센트럴(Menara AIA Sentral)은 개보수(retrofit) 작업을 통해 공실률을 낮추고 임대료를 제고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나이트프랭크의 말레이시아 법인 사무실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이전하며 새 단장을 마친 이 오피스는 바이오필리아(biophilia), 음향, 공기질, 자연 채광 및 배치(layout) 등과 같은 요소를 통합해 지속가능성과 건강, 웰빙을 우선시한다. 참고로 바이오필리아란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실지로 나이트프랭크는 순환경제(circular economy) 트렌드에 발맞춰 재활용이 가능한 재료로 만든 인테리어 마감재를 선택했다. 화학물질 배출이 적은 디자인 방식을 중시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사무실 입구에는 이끼를 보존한 녹색 벽면이 임직원과 고객을 맞이한다. ESG 철학을 입체적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나이트프랭크는 미학, 인체공학(ergonomics), 기능성(functionality), 지속가능성을 두루 고려한 오피스 환경을 구현하는 데 무게중심을 두었다.
ESG 때문에 베트남과 태국에 투자 기회를 빼앗길 수 있다면?
물론 아직 갈 길이 멀다. 여타 국가에서 ‘ESG 회의론’이 듬성듬성 제기되는 것처럼, 말레이시아에서도 ESG 원칙을 선제적으로 수용하려는 트렌드뿐 아니라 ESG 경영에 소극적인 분위기 또한 감지된다. 나이트프랭크는 말레이시아에서 ESG 도입을 가로막는 주요 요인이 비용 문제, 인식 부족, 데이터 부족이라고 분석했다. 그 외로는 ESG 프레임워크 표준화의 부족, 전문성 부족, 규제 및 정책의 불확실성 등이 뒤따랐다.
아울러 그린 리스(Green Lease, 친환경 임대차동의서) 도입을 통한 여러 유형적인 이익(운영 비용 절감, 입주자들의 건강권 보장 및 생산성 향상, 자산 가치 상승)에도 불구하고 아직 말레이시아 상업용 부동산 시장에서 그린 리스에 대한 관심은 미온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선웨이 리츠(Sunway REIT)가 그린 리스 파트너십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등 고무적인 모습도 목격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임차인은 임대인과 긴밀히 협력해 스코프 3 배출량 감축에도 공동으로 진력하게 될 것이다.
상업용 부동산 시장에서 ESG 어젠다는 신축뿐 아니라 개축, 리모델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오피스, 리테일 등 상업용 부동산은 우리의 일상과 밀접히 맞닿아 있다. 그래서 기업, 투자자, 정부, 시민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지금의 변화를 각자의 시각으로 찬찬히 지켜보고 있다.
ESG는 그저 허울 좋은 소리를 늘어놓는 레토릭이 아니다. 비즈니스 현실 그 자체다. ESG 때문에 투자 기회를 다른 나라에 뺏길 수 있다. 최근 말레이시아에서 개최된 콘퍼런스에서 현지의 한 전문가는 몇 년 전 유럽과 미국의 투자자와 물류센터 거래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말레이시아에 친환경 등급 물류센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태국으로 투자 기회가 넘어간 사례를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는 청중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베트남에는 있는데 말레이시아에는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경쟁할 수 있을까요?” 우리 상황에 대입을 하면, 적이 무거운 질문이다. ESG는 이제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간 경합의 영역으로 격상됐다. 넓어진 무대, 긴장감과 기대는 늘 교차한다.
☞ 김민석 팀장은
김민석 팀장(listen-listen@nate.com)은 대체투자 전문 자산운용사인 마스턴투자운용에 재직 중이다. 브랜드전략팀 팀장과 ESG LAB의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경영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행정학·정책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필명으로 몇 권의 책을 내기도 했다. 대통령 직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서울에너지공사 시민위원,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외부전문가 자문위원 등으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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