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 피로감(diversity fatigue). 외신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표현이다.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운위됐으니, 미국에서는 이미 약 3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언어다. 의미는 단어 자체에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다양성, 최근 부상하는 개념으로는 DEI(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로 인해 모종의 피로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애초에 이 용어는 채용뿐 아니라 리텐션(retention) 측면에서도 인력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움직임 혹은 주장과 관련한 유무형의 스트레스를 의미했다. 최근에는 다양성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 자체에 지친 사람들, 혹은 아직도 좀처럼 쉬이 개선되지 않는 다양성 부족에 환멸을 느끼는 부류까지 개념이 확장됐다.

 

DEI 리더 6명 중 1명이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DEI 예산 지출은 2배 증가

이런 ‘피로감’을 호소하는 그룹이 엄존하지만, DEI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전 세계 기업들은 2026년까지 DEI 관련 노력에 154억 달러(약 21조원) 이상을 지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2020년의 75억 달러(약 10조원)에 비해 6년 만에 무려 두 배가 증가한 것이다.

ESG와 DEI가 조직문화뿐만 아니라 채용이나 투자 측면에서도 기업에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음에도, ESG에 대한 대항 논리가 왕성하게 제기되는 것처럼 DEI 또한 적잖은 어려움에 부딪히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는 ‘포용성 어젠다(inclusivity agendas)’에 심대한 타격을 줬다. 팬데믹 기간 경제적,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하며 사회적 포용성에 대한 심층 토론과 공감대 형성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비즈니스 현장에서 느끼는 위기감은 더욱 크다.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스탠더드앤푸어스(S&P) 500대 기업의 다양성 리더 6명 중 1명이 자리를 떠났다는 분석은 실로 뼈아프다. 이는 기업들이 DEI가 조직에 정착하는 데 충분한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지 않고 있으며, DEI 책임자들은 회사의 지원 부족으로 직무 수행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시사한다.

위에서 전 세계적으로 DEI 관련 노력에 예산이 증액되어 투하될 것이라는 예상치를 기재한 바 있다. 물론 긍정적인 변화로 볼 수 있지만, DEI는 삽시간에 이뤄지는 단기성 프로젝트가 아니다. DEI가 이끄는 진전 자체가 더디기 때문에 다양성과 형평성, 포용성을 향한 실질적인 변화에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성과 전략이 효과적인지 보다 명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DEI의 성공 요인 다섯 가지

글로벌 패리티 얼라이언스(Global Parity Alliance)가 세계경제포럼(WEF), 맥킨지앤컴퍼니(McKinsey&Company)와 협업하여 공개한 보고서 <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 Lighthouses 2023 Report>는 DEI 이니셔티브를 성공으로 이끄는 다섯 가지 요인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근본 원인에 대한 세밀한 이해다. 구체적인 DEI 관련 기회 영역을 체계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투자, 목표 설정, 솔루션 설계 등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효율을 높일 수 있다. 관련 데이터를 세밀하게 분석해서 DEI 정책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의 관점에서 문제의 근본 원인을 밀도 있게 이해하는 접근법이다.

두 번째는 성공에 대한 의미 있는 정의다. 명확하고 측정 가능한 장단기 목표를 설정하여 성공의 의미를 규정하는 과정이 긴요하다. 이것이 선행돼야 이후 객관적인 평가가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다. 에너지 기업인 슈나이더 일렉트릭(Schneider Electric)은 2025년까지 50/40/30이라는 성비 목표를 내세웠다. 신입사원의 절반, 실무 관리자의 40%, 임원의 30%를 여성 직원으로 구성하겠다는 복안이다. 성공의 척도가 수치로 표현된 것이다.

세 번째는 책임감 있는 비즈니스 리더다. 대표이사를 포함한 C 레벨 고위직들은 DEI를 비즈니스의 핵심 우선순위로 설정하고, 예산 투입과 활동 참여뿐 아니라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글로벌 코스메틱 브랜드 시세이도(SHISEIDO)는 일찍이 2014년에 CEO가 DEI를 회사 기업 전략의 핵심 축으로 삼으면서, 고위 경영진도 ‘사회적 가치 지표(social value indicator)’를 관리하며 DEI를 경영의 우선순위로 삼게 됐다.

네 번째는 상황에 맞게 설계된 솔루션이다. DEI가 보다 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한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고 무엇보다 일상 업무에 통합되는 솔루션이 요구된다. 다섯 번째는 엄격한 추적(tracking) 및 과정 수정(course correction)이다. 핵심은 핵심성과지표(KPI)의 설정이다. KPI가 구체화되면, 회사의 리더는 진행 상황을 보다 면밀히 모니터링하게 되고, 필요한 경우 사내에 여러 자원을 추가로 DEI 움직임에 할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150년의 무게감 그리고 숨겨진 초능력

미국에서 ‘다양성 피로감’이라는 말 자체가 30년의 나이테를 가졌다는 것은 ‘다양성’에 대한 요구와 강조는 역사가 그보다 훨씬 오래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상황이 다르다. 아직 피로감을 이야기할 계제가 아니다. 피로감이 쌓일 만한 시간도, 노력도 충분치 않았다.

세계경제포럼의 글로벌 성 격차 보고서 <Global Gender Gap report 2022>는 현재 진행 속도로 모든 수준에서 글로벌 성 격차를 해소하려면 150년 이상이 더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150년의 무게감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젠더 갈등이 비화하고 있는 우리는 더욱 그렇다. DEI는 주창의 역사가 늦은 만큼 적실한 방향타 설정이 중요하다. 위의 다섯 가지 요인을 국내 실정에 맞게 창의적으로 적용해 보는 노력을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포용성이 단지 좋은 것만이 아니라, ‘필수’라고 단언했다. 오늘날과 같이 대내외 경제 여건이 불확실하고 산업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한경쟁이 일상화된 치열한 시장환경에서 포용성은 ‘숨겨진 초능력(hidden superpower)’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BCG는 직장에서 포용성을 제대로 구현하면 직원 이탈 위험(attrition risk)을 절반 가까이 줄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초능력자로 가는 길, 그리 멀리 있지 않다.


☞ 김민석 팀장은

김민석 팀장
김민석 팀장

 

김민석 팀장(listen-listen@nate.com)은 대체투자 전문 자산운용사인 마스턴투자운용에 재직 중이다. 브랜드전략팀 팀장과 ESG LAB의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경영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행정학·정책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필명으로 몇 권의 책을 내기도 했다. 대통령 직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서울에너지공사 시민위원,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외부전문가 자문위원 등으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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