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이는 자꾸 밖에 나가자고 한다. 두 돌 하고 몇 개월이 더 된 아기 왕자님은 세상 밖의 모든 것이 신기하다. 나무도, 자동차도, 그네도, 옆집 강아지도 다 흥미롭기만 할 터이다. 

다시 집에 들어오고 좀 더 어두워지니 이젠 달과 별을 보고 싶다고 보챈다. 아빠에게 달랑 안겨 달을 한번 보고 와서 '코~' 하겠다고 한다. 천사의 애교에 아빠는 다시 아이를 안고 밖을 향한다. 하늘 색깔이 오묘하다. 검은색도 아니고, 남색도 아니다. 진보라색이라고 말해주었다. 달이 보이지 않으니, 아빠에게 달이 어디 갔냐고 묻는다. 구름 뒤에 숨었다고 답해주었다. “이제 하루가 지나갔네”라는 말과 함께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아이는 그러면 하루는 어디 갔냐고 되묻는다. 꼬마 시인과의 대화는 늘 즐겁고 벅차다. 

윙윙. 9월이니 예전 기준으로는 ‘가을’ 밤이다. 낭만적인 부자의 대화를 방해하는 놈이 있었으니, 바로 나의 목과 팔, 다리를 물고 간 모기다. 지독하다. 나야 물려도 상관없는데, 아이의 하얗고 토실한 종아리에도 모기의 흔적이 발견됐다. 물 곳이 어디 있다고 저 작은 아기를. 밤에 애를 데리고 나가지 말라고 아내에게 혼이 났다.

 

수형(受刑) 생활의 위협요소가 된 불더위, 감옥 내 단체행동까지 유발

9월인데 최근까지 꽤 더웠다. 어린이집에 간 아이의 사진이 오후 2시쯤 부모가 볼 수 있는 앱에 올라오는데, 아이들의 복장이 다들 아직 한여름이다. 이러다 갑자기 또 추워지겠지. 가을의 상실. 예전 9월과 10월의 분위기가 그립다. 

9월에 폭염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벨기에에서는 1892년 공식 기록 이래 처음으로 ‘9월 폭염’(벨기에 기상 당국 기준)이 관측됐다. 영국도 30도가 넘어가는 날이 9월 기준 최장 기록을 경신했다. 프랑스에서는 무더위가 노동 문법까지 바꾸고 있다. 포도 수확 시간대가 대낮에서 밤늦은 시간 혹은 새벽으로 변경된 것이다. 이제 보드로 와인은 새벽 노동의 결과물이 됐다.

미국 미네소타에서는 죄수들의 단체행동이 벌어졌다. 37도를 상회하는 폭염 탓에 감방 복귀를 거부한 것이 그 이유다. 이 또한 마찬가지로 올 9월에 일어난 소동이다. 이례적인 폭서로 미국에서는 냉방 시설이 열악하거나 환기가 잘되지 않은 교도소 수감자들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후 미네소타 교정국은 교도소의 포괄적인 식수 검사를 명령하기도 했다.

 

2021년 도쿄, 폭염으로 기권자 속출했던 ‘생존 게임’

2021년에 개최된 도쿄 올림픽에서는 경기 도중 극심한 더위를 못 버티고 기권하는 선수가 속출했다. 4년, 아니 무려 5년을 기다린 국제 대회에서 각 국가의 최고 기량을 가진 최정예 선수들이 살인적인 폭염에 경기를 포기한 것이다. 귀책은 선수들에 있는 게 아니라, 기후에 있다. 올림픽이 ‘생존 게임’이 됐다. 

러시아의 양궁 선수는 열사병으로 쓰러졌고, 마라톤 대회에서는 수십 명이 경기를 다 마치지 못했다. 테니스 경기장에서는 “만일 내가 죽으면 당신이 책임질 것이냐”라는 말도 나왔다. 세계 랭킹 2위 선수의 입에서 터져 나온 절규다. 휠체어를 타고 경기장 밖으로 나가는 선수의 모습도 전 세계에 방영됐다.

당시 일본 NHK 방송의 한 기상캐스터는 “폭염이 도쿄의 올림픽 선수들과 자원봉사자들을 고문하고 있다”라는 말을 SNS에 올렸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은 ‘도쿄 올림픽 선수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역대 가장 더운 올림픽으로 고문을 당하다(tortured)’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에 고문이라는 수식이 붙다니. 참으로 비극적인 결합이다.

 

더위 문제에 맞서는 ‘기후 전사’ CHO(Chief Heat Officer)의 등장

이러다 보니 이색적인 직책이 생겨났다. 이 기후 전사의 이름은 CHO다. CFO(최고재무책임자), CTO(최고기술책임자), CMO(최고마케팅책임자), COO(최고운영책임자)가 아닌 CHO(Chief Heat Officer)다. 최고폭염책임자, 최고열관리책임자 등 번역도 아직 제각각이다. 폭염으로 인한 위험을 관리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며, 사고에 대응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중차대한 역할이 CHO에게 주어졌다. 

2021년 미국 마이애미에서 세계 최초의 CHO가 탄생했다. 미국에는 마이애미뿐 아니라 로스앤젤레스와 피닉스에도 CHO가 활약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그리스 아테나, 아프리카에서는 시에라리온 프리타운, 남미에서는 칠레 산티아고, 아시아에서는 방글라데시 다카(정확히는 Dhaka North City Corporation 소속)가 각 권역의 선도적인 CHO 도입 도시로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도심 속 ‘피서 쉼터’를 마련하고, 폭염 피해를 알리는 경보 체계를 구축하며, 에너지 절약에 대한 인식 개선 캠페인을 기획한다. 그 과정에서 유관 부처와 협의하고, 정책 입안자들에게 녹지공간의 비중을 늘리고 고효율 에어컨을 설치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또 폭염에 대한 장단기 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하고 실행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한다.

폭염은 공중보건의 혜택에서 유리되기 십상인 취약계층에 더 큰 타격을 준다. 다른 재난과 마찬가지로 폭염의 여파는 불평등한 얼굴을 띤다. 특히 야외작업 근로자는 휴식을 포기하면서까지 고된 일에 매달리게 되는데, 햇볕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이들은 열사병 등으로 고통받을 공산이 크다. 에어컨도 쉽게 틀 수 없는 환경일 것이다. 그래서 CHO는 사회적 약자의 곁에서 시선을 떼서는 안 된다. E(환경) 측면뿐 아니라 S(사회) 측면에서도 CHO의 역할은 막중하다.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의 CHO인 유지니아 카르그보(Eugenia Kargbo)는 기후변화가 코로나19와 마찬가지로 전 세계적인 문제이기에 공동으로 이 문제에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폭염으로 유럽에서만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은 상황에서, 국제사회는 폭염 문제에 힘을 합쳐야 한다. 

한국에도 CHO가 탄생하게 될까? 부처와 지자체에서도 숙고할 부분이다. 폭염이 전통 행정학의 내러티브를 뒤흔들고 있다. CHO까지 생겨날 지경이라면,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깊어지는 가을밤, 예전 같았으면 창고에 들어가야 할 선풍기가 고개를 쳐들고 좌우로 회전하고 있다. 가을은 좀 가을 같았으면 좋겠다. 


☞ 김민석 팀장은

김민석 팀장(listen-listen@nate.com)은 대체투자 전문 자산운용사인 마스턴투자운용에 재직 중이다. 브랜드전략팀 팀장과 ESG LAB의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경영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행정학·정책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필명으로 몇 권의 책을 내기도 했다. 대통령 직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을 역임했고,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외부전문가 자문위원, 경기도사회적경제원 외부 전문위원, 서울에너지공사 시민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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