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자동차 업종에 탄소배출권 거래제를 도입하는 등 전기차 중심으로 구조 개편을 진행하려고 하자, 완성차·하이브리드 차 중심의 일본 산업이 무너질 수 있다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국내 또한 ‘전 세계 미래차 1등을 선점하겠다’며 자동차 산업을 전기차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목표를 밝히고 있지만, 이에 따른 피해 업체의 구제책 등에 대한 논의는 비교적 미미한 상황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10일 자동차업계 관계자들을 모아 탄소배출권 거래제 도입을 둘러싼 회의를 개최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이 보도했다. 이는 스가 총리가 선언한 ‘2050년 넷제로’를 달성하기 위해, 2030년 중반부터 내연기관차 판매를 중단하겠다는 정책의 일환이다. 자동차 제조사에 전기차 등 친환경차 판매 비율 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달성하지 못했을 땐 이미 목표량을 초과한 기업으로부터 배출권을 매입해 목표 달성을 하게 하는 방식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내연기관차 퇴출을 목표로 탄소배출권 거래제를 도입하면, 대처가 느린 기업은 배출량 구입이나 벌금 등 부담이 증가해 탈내연기관을 위한 기술 개발에 임하게 될 것”이라며 기대를 비췄다. 일본 탄소배출량의 20%는 내연기관차에서 나온다. 일본 정부는 탄소를 감축하기 위해 2030년까지 전기차와 플러그 인 하이브리드차(PHV) 보급 비율을 전체 자동차 보급의 20~30%까지 늘리겠다고 밝혔지만, 넷제로를 달성하기 위해선 목표를 대폭 상향해야 한다는 비판이 이어져왔다. 지난해 기준 일본 내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 판매비율은 0.9%에 그쳤다.
이에 정부는 “2030년대 중반까지 하이브리드차를 포함해 100% 탈내연기관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목표를 대폭 수정하긴 했지만, 여전히 하이브리드차(HV)가 포함됐다. 하이브리드차는 내연기관과 배터리를 모두 사용하는 차량이다. 2035년까지 HV를 제외한 순수 전기차로 전환하겠다는 영국의 계획에 비해 느슨한 편이다. 현재 일본 신차 판매량의 60%는 내연기관차, 30%는 하이브리드 차량이다. 일본 경제를 지탱해 온 자동차 산업이 구조적 전환에 뒤처질 리스크가 있기 때문에 유보적인 목표를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산업성 발표에 기업들 엇갈린 반응
"이대로라면 일본에서 자동차를 만들 수 없다"며 강력 비판하기도
경제산업성의 발표에 기업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닛산은 “(경제산업성의 방침은) 도전적인 목표이지만, 전 세계적인 흐름은 탈내연기관을 향해 가고 있다”며 “탈내연기관에 대한 대응은 불가피하다”며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가장 크게 반발한 기업은 도요타다. 도요타는 작년 판매량의 40%를 전기차로 채우고, 2025년까지 모든 차종에 배터리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했음에도 정부의 발표에 강하게 반발했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도요타 아키오 도요타자동차 사장은 “이대로라면 일본에서 자동차를 만들 수 없다”며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고 알려졌다. 도요타 사장은 “급격한 구조 전환은 자동차 업계의 비즈니스 모델을 붕괴할 수 있다”며 “화력발전 비중이 높은 에너지 정책의 대변혁이 친환경 자동차 도입 강제보다 우선”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그는 전기자동차가 제조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사실을 언급하며 “전기차가 탄소 배출 제로라고 볼 수 없다”며 “당장 실효성이 가장 높은 것은 하이브리드차량이다. 정치인들이 (이런 사실을) 이해하고 ‘휘발유차를 없애겠다’고 말하는 것인가”라며 비판했다. 또 휘발유차 비율이 높은 경자동차에 대해 "지방에서 경차는 완전히 생명선"이라며 "지금까지 쌓아올린 업적이 허사가 되지 않도록 일본의 장점을 유지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경차는 경제성 문제로 대부분이 휘발유 차량이다. 도요타의 자회사로 일본 최대 경차 메이커인 다이하쓰는 주력 모델 전부가 휘발유차다.
전기차, 내연기관차에 비해 들어가는 부품 적어...
전동화는 자동차 산업의 피라미드를 뒤흔들 것
도요타 사장이 언급한 ‘비즈니스 모델의 붕괴’라는 위기감은 완성차 업체를 포함한 자동차 산업 구조 전반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내연기관차의 경우 부품이 약 3만개가 들어간다. 반면 전기차는 배터리 중심으로 제조되기에 들어가는 부품 수가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 전기차 판매량이 늘어날수록, 전기차에 불필요한 부품 업체는 업종 전환이나 폐업 위기를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자동차 업계들이 하이브리드차를 규제 대상에 넣지 않은 것에 가슴을 쓸어내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내연기관차 엔진에 들어가는 부품을 다루는 중소기업 관계자는 “엔진이 필요 없는 전기차 판매량을 얼마만큼 확대할지 걱정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일본 자동차 산업은 도요타, 닛산 등 완성차 제조사를 중심으로 부품 제조 대기업, 부품 제조 중소기업순의 피라미드 형태를 이루고 있다.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약 542만명으로, 일본 전체 취업 인구의 약 8%에 해당한다. 특히 부품 협력업체에 종사하는 인구는 약 70만명이다. 일본경제신문에 따르면, 2030년 전기차가 신차 판매 비중의 25%, HV가 50%를 차지하게 되면 부품 협력업체 일자리는 2.2만개가 감소한다고 예측된다. 전기차와 수소차 보급만 허용되면 최대 20만개의 일자리가 감소된다. 부품 업계 일자리의 약 70%가 감소하는 셈이다.
또한 기술 개발에서도 일본 기업들의 부담은 만만찮다. 자동차 배터리는 현재 CATL 등 중국 업체들이 우세한 상황인데, 일본 기업들이 기술 개발로 반격하지 못하면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 있다. 일본의 경우 하이브리드 엔진에 초점을 맞춰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지만, 일본 정부의 기조에 따라 이를 포기하고 배터리 기술 개발에 전력을 다해야 할 판이다. 도요타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업적이 허사가 되지 않도록 일본의 장점을 유지해달라”고 언급한 이유다.
소수 완성차 업체 의존도 80%
미래차로 근간 바뀌면 25만명 일자리 잃을 수도
우리 정부도 ‘2050 넷제로’를 선언하며 전기차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지난해 10월엔 ‘2030 미래자동차 산업 발전전략’을 발표하며 2030년까지 신차 판매 비중에서 전기·수소차가 차지하는 비율을 33%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다. 올해 신차 판매량 중 친환경차 판매량은 3%. 이를 10배 이상 키운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 현재 4%대에 그치는 미래차 부품기업을 20%까지 늘리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발표한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에서도 전기·수소차 등 친환경 자동차로의 전환은 비중있게 다뤄졌다. 정부는 “수송 부문에서 전기·수소 등 청정 에너지원을 동력으로 하는 수송 수단을 확대하겠다”며 친환경차 전환을 필수 과제로 뒀다.
국내 자동차 기업도 이에 발맞춘 목표를 내놨다. 현대차는 “앞으로 수익구조를 전기차 중심으로 하겠다”며 내년 전기차 판매 목표를 16만대로 잡고, 이를 점차 늘려 2025년엔 56만대를 판매하겠다고 선언했다. 기아차는 2025년에 전 차종에 전기차 11종을 갖춰 2026년에 전기차 50만대, 친환경 차 100만대 판매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만약 자동차 산업의 근간이 전기차 등 친환경 자동차로 전환된다면, 국내 자동차 산업은 일본보다 더 심각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최근 발표된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에서도 자동차 산업의 피해가 대표적인 저탄소 경제 전환의 피해 사례로 언급됐다. 전체 자동차 부품업체의 31.4%(2800개)가 내연기관차 부품업체로 종사자는 25만명에 달한다.
국내 자동차 산업은 일본 자동차 산업과 마찬가지로 완성차 기업-부품 제조 대기업-부품 제조 중소기업의 피라미드로 수직적 하청관계로 이뤄져 있다. 완성차 기업 의존도가 거의 80%에 달해 부품업체 자체의 제품·시장 경쟁력이 취약하다. 스스로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시장을 개척할 역량도 축적되어 있지 않다. 현대·기아차 등 완성차 업체의 전략이 전기차로 옮겨지면, 이들의 고용 피라미드는 단기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IBK경제연구소의 2018년 보고서 ‘한국 자동차부품산업의 경쟁력분석과 대응 방안’에 따르면 전기차 전환에 따라 1만여개의 부품업체들 중 28%에 해당하는 2896개의 부품업체가 사장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부품사들은 현대차(의 계획)에 쫓아가게 돼 있는데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현대차가 (전기차 전환 관련 계획)을 뚜렷하게 발표하지 않았다"며 "그때까지 내연기관차에 집중하다 지난해 5월 현대차가 노사 세미나를 하면서 전기차에 집중하기로 완전히 돌아서면서 부품사들이 우왕좌왕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부도 하청업체 생존 대책에 손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2030 미래차 산업 발전 전략’의 후속 조치로 올해 5월 부품기업의 미래차 사업 전환을 위한 사업화 컨설팅, 시제품 제작, 평가·인증 등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지원 대상은 70개 내외의 중소·중견 자동차 부품기업이다.
하지만 앞으로 10년 안에 이 모든 변화를 감당하기엔 시작이 늦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전환기 자동차부품산업의 현황과 전망’에 따르면, 응답노조 77곳 가운데 수소·전기차 관련 제품을 개발하고 부품을 생산하고 있다고 답한 사업장은 12.7%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현대IHL·현대모비스 등 현대차 그룹 계열사를 제외하면 7.3%에 그쳤다. 홍석범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자동차 부품사의 미래차 체제 진입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금속노조의 정책이 해당 부품사의 규모, 가치사슬 지위, 지불능력에 따라 보다 다각화하고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비단 자동차 산업 뿐 만이 아니다. 철강·석유화학·정유·시멘트 등 고탄소 배출 업종에게도 서서히 전환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이다. 산업연구원은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추진할 경우 제조업 부문 생산이 최대 44%, 고용은 최대 134만명 감소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이제 전환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대비책이 더 중요해진 타이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