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 총리는 최근 발생한 대규모 정전 사태 이후에도 재생에너지에 대한 자신의 정책적 의지를 "1밀리미터도 바꾸지 않겠다"고 밝혔다.
7일(현지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의 보도에 따르면 산체스 총리는 지난주 이베리아 반도에서 발생한 정전 사태와 관련해 처음으로 의회에서 발언하며, 이번 사태의 원인을 스페인의 풍력 및 태양광 발전 의존 탓으로 돌리는 야당에 반박했다. 다만, 정전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산체스 총리, “재생에너지 확대 에너지 로드맵 고수할 것”
이번 정전은 유럽 역사상 가장 큰 규모 중 하나로, 스페인의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력망 개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산체스 총리는 재생에너지 정책을 지난 7년간의 임기 동안 주요 성과로 내세워 왔다.
산체스 총리는 “2018년부터 우리가 계획해온 에너지 로드맵에서 단 1밀리미터도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재생에너지는 우리나라의 에너지 미래일 뿐 아니라, 유일하고 최고의 선택지이며, 스페인을 재산업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이번 정전은 단 5초 만에 스페인 전체 전력 공급의 60%에 해당하는 15기가와트(GW)의 전력이 손실되며 발생했다. 이로 인해 전력망이 불안정해졌고, 여러 발전소가 연쇄적으로 가동을 멈췄다.
그러나 정확한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야당인 국민당(PP)의 대표 알베르토 누녜스 페이호(Alberto Núñez Feijóo)는 “아무런 확정적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에너지 정책이 원인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라며 정부의 태도에 의문을 제기했다.
정부는 정확한 원인을 조사 중이며, 결론이 나오기까지는 수 주가 걸릴 수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수백만 개의 데이터를 분석해야 한다고 밝혔으나, 비판 여론은 고압 송전망이 재생에너지에 과도하게 의존한 것이 원인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풍력·태양광, 전력망에 ‘관성’을 제공하지 못해
산체스 총리는 정전이 발생한 4월 28일 당시, 스페인의 전력 시스템에서 재생에너지 비중은 평소보다 낮은 70% 수준였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태양광 발전의 비중은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일부 전문가들은 풍력 및 태양광 발전소는 가스나 원자력 발전소처럼 전력망에 ‘관성(inertia)’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을 약점으로 지적했다. 기존 회전체 발전기는 물리적 관성을 통해 갑작스러운 발전기 정지나 전력 손실 상황에서도 회전 운동을 유지하여 전압과 주파수를 일시적으로 안정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회전 관성은 전력 시스템의 균형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에 대해 산체스 총리는 "태양광 설비도 터빈 발전기처럼 안정화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술이 존재하며, 현재 스페인 태양광 발전소의 절반은 해당 기술을 이미 보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제 과제는 이를 실제로 전력망에 통합하는 일”이라며 규제당국과 전력망 운영자들이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블룸버그NEF(BloombergNEF)에 따르면, 스페인은 청정에너지 투자 대비 전력망 투자 비율이 유럽에서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5년간 스페인은 재생에너지에 1달러를 투자할 때마다 전력망에는 평균 30센트를 투자한 반면,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는 이 비율이 평균 70센트 수준이었다.
원전 유지비용, 초고소득 에너지 경영진이 부담해야
스페인은 2027년부터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는 계획을 고수하고 있다. 이번 정전 사태 이후 원전 수명을 연장하라는 요구가 다시 제기됐지만, 산체스 총리는 이를 일축했다. 그는 “이번 사고가 재생에너지 과잉이나 원자력 발전소 부족 때문에 발생했다는 실증적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산체스 총리는 “원전 폐쇄 계획 재검토의 전제는 재정적 실행 가능성”이라며 “그 비용은 국민이 아닌 원전 운영 에너지기업의 고소득 경영진이 부담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력업계는 2019년 수립된 2035년까지 원전을 단계적으로 폐쇄하는 계획에 대해 재검토를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정부는 그동안 원전 연장에 소극적인 입장을 유지해왔으나, 최근에는 기업들이 구체적인 제안 조건을 제시할 경우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공공재정에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다.
현재 스페인 원전 운영사로는 이베르드롤라(Iberdrola), EDP, 엔데사(Endesa) 등이 있으며, 이들은 원전이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며 새로운 재정적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산체스 총리는 전력회사들과의 회동 사실을 밝히며 “이들 경영진은 원전이 수익성이 없고 경제적으로 경쟁력이 없기 때문에 폐쇄하길 원한다고 말했다”며 “일부 기업들이 계속해서 수익을 얻기 위해 시민의 건강을 위협하거나 전기요금을 인상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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