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에너지 대기업 BP의 헬게 룬드(Helge Lund) 이사회 의장이 17일(현지시간)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전례 없는 반대표를 받았다.

로이터, CNBC, 가디언 등 주요 외신은 이번 표결 결과에 BP의 기후 전략 철회에 대한 기관투자자들의 불만이 반영됐다고 보도했다.

사진=언스플래쉬 
사진=언스플래쉬 

이날 주총에서는 무레이 오친클로스(Murray Auchincloss) 최고경영자(CEO)와 룬드 의장이 재선임됐으나, 결과는 극명하게 갈렸다. 오친클로스 CEO는 97%의 지지를 얻은 반면, 룬드 의장은 75.7%에 그쳐 지난해 98% 대비 큰 폭으로 하락했다. 투자전문매체 IPE는 “사실상 주주들의 경고 메시지”라고 평가했다. 

BP는 “6개월 이내에 주주 의견을 반영한 후속 조치를 마련하겠다”고 밝혔으나, 시장에서는 룬드 의장의 조기 퇴임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기관투자자들의 반발은 BP가 ‘넷제로(Net Zero)’ 전략을 후퇴시킨 데서 비롯됐다. BP는 2020년, 2030년까지 석유·가스 생산량을 40% 감축하고 재생에너지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공언했지만, 3년 만에 주주 승인 없이 목표를 낮췄다. 지난 2월 오친클로스 CEO는 화석연료 중심 전략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하며, 2030년까지 하루 생산량을 250만 배럴까지 확대할 계획을 제시했다. 이는 기존 계획보다 약 60% 많은 수치다.

오친클로스 CEO는 “그린 전환에 대한 과도한 낙관을 인정한다”며, “이제는 장기적 주주 가치 중심으로 판단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전략 선회는 기관투자자들의 신뢰 이탈로 이어졌다. 영국 자산운용사 리걸앤드제너럴(Legal & General)은 룬드 의장에게 반대표를 행사하겠다고 예고했고, 영국 연기금 보더 투 코스트(Border to Coast)도 일부 이사에 대해 일괄 반대표를 던졌다. 

 

같은 주총, 다른 목소리…행동주의 펀드는 정반대 요구

BP와 주주 간 갈등은 경영진이 넷제로(Net Zero) 기후 전략을 일방적으로 철회한 데서 본격화됐다. 2020년 BP는 넷제로 전략을 발표하며 2030년까지 석유·가스 생산량을 40% 줄이고, 재생에너지 투자를 대폭 확대하겠다고 선언했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주총에서 정반대의 주주 압박이 동시에 발생했다는 점이다. 행동주의 투자자인 엘리엇 매니지먼트(Elliott Management)는 오히려 "BP의 기후 전략을 후퇴하라"고 압박해 왔다. 엘리엇은 올해 초 BP 지분 약 5%를 확보한 뒤, 수익성 제고와 지배구조 개편을 요구해 왔으며, 화석연료 중심 전략 강화를 촉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BP가 신재생 사업에 치중한 나머지 기존 수익 기반을 약화시켰다고 본 엘리엇은, 미국 셰일 및 연료 마케팅 사업의 매각 또는 분사 가능성까지 제기했다. 총회 당일 엘리엇은 별도 질의를 하지 않았지만, 외신들은 이를 ‘조용한 압박 전략’으로 해석했다.

룬드 의장은 “저탄소 신사업에 과도하게 집중한 반면, 기존 사업의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며 “일부 주주들과의 대화에서는 지지를 확인했다”고 해명했다. 그는 “기후 전략에 대한 반대가 대다수의 의견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행동주의 공세에 월가도 ‘방어 모드’…IB 비즈니스 이해관계 뚜렷

한편,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공세가 거세지면서 금융권도 방어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JP모건체이스(JPMorgan Chase)는 18일(현지시간), 행동주의 대응 역량 강화를 위해 던컨 헤링턴(Duncan Herrington)과 린든 박(Lyndon Park)을 글로벌 주주관여 및 M&A 자본시장 그룹 전무이사로 영입했다고 밝혔다. 헤링턴은 씨티그룹(Citigroup) 출신으로 주주활동 대응 자문을 맡아왔고, 박은 블랙록(BlackRock)에서 ESG 전략을 총괄한 바 있다.

이미 JP모건은 2020년부터 행동주의 투자자 대응 전담 조직을 확충해왔으며, 주요 고객사의 경영권 방어 전략을 지원해왔다. 최근에는 조직과 인력을 확대하며 이 분야의 자문 역량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블룸버그가 2023년 집계한 글로벌 금융자문 리그 테이블에 따르면, JP모건은 행동주의 대응 부문에서 2위를 기록했다. 2020년 당시 8위였던 점을 감안하면 빠른 성장세다. 

이처럼 월가가 적극 대응에 나서는 배경에는 자문 비즈니스 구조가 있다. 대형 IB들은 고객사 경영진과의 장기적 관계를 기반으로 자금조달, 기업공개(IPO), 인수합병(M&A) 등 각종 서비스를 제공한다. 행동주의 펀드의 압박으로 경영진이 교체되거나 전략이 급변하면, 기존 자문 계약이 끊기거나 경쟁사로 교체될 위험도 따른다. 따라서 IB 입장에선 고객사의 경영권을 지키는 일이 곧 자신들의 비즈니스를 지키는 일이 되는 셈이다.

은행 및 법률업계 관계자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화와 주가 하락 등으로 기업들이 행동주의 투자자에 더욱 취약해지고 있다”며, “대형 투자은행과 일부 부티크 자문사를 중심으로 관련 대응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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