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는 글로벌 기업이 수준 높은 기후위기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며 글로벌 기준 맞추기에 한창이지만, 정작 글로벌 기업들은 기후위기 대응 시기를 늦추기 위해 로비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싱크탱크 인플루언스맵이 탄소 배출을 저감하려는 투자자 행동 이니셔티브인 기후행동 100+(CA100+)이 관리하는 전 세계 300개 기업과 150개 산업협회를 대상으로 로비 활동에 대해 조사한 결과, 91%의 기업이 파리협정에 맞지 않는 로비를 벌이는 산업 협회에 적을 두고 있거나 기후대응을 미루기 위해 로비를 벌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석유·가스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에너지 산업이 반(反)기후위기 로비를 벌이고 있었으며, 자동차·화학·시멘트·광업·철강·수송 등 탄소 중배출 산업도 이와 같은 흐름을 보였다. 반면 유니레버, 네슬레, 다국적 에너지 기업인 SSE 등 10%의 기업만이 기후대응을 가속화하기 위한 로비를 진행했다.
개별 기업들의 공동체인 산업협회로 대상을 확대하면 반 기후정책 로비는 더욱 두드러졌다. 기업의 91%가 파리협정에 맞지 않는 기후 로비를 진행하는 산업협회에 가입한 것이다. 특히 에너지 업계의 로비는 타 산업군에 비해 두드러졌다. 엑손모빌, 쉐브론, 로얄더치쉘 뿐 아니라 에너지 전환에 나서고 있어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BP 또한 기후 변화 대응을 저지하는 로비를 펼친 산업협회에 가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인플루언스맵의 로비 및 기업 영향력 담당 에드 콜린스 이사는 “많은 기업들이 파리에 대한 지지 성명을 발표했지만 그들의 구체적인 로비 행태와 또한 로비의 행태를 살펴보면 산업협회를 중심으로 아주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CA100+에 가입한 투자자들은 기업의 로비를 중요한 관리 대상으로 보고 이를 경고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캘퍼스, 뉴욕연기금, 보스턴 트러스트 월든은 탄소 다배출 기업 47곳에 서한을 보내 “기업 로비에 대한 투명한 정보공개가 필요하다”며 “파리협정을 달성하기 위한 로비는 용인될 수 있지만, 그 외의 로비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감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경고는 행동으로도 이어졌다. CA100+에 참여한 기업들은 주주총회를 앞두고 기후 로비에 대한 주주제안을 진행하기도 했다. 지난해 BNP파리바자산운용은 쉐브론과 듀크에너지, 호주의 에너지 기업 산토스, 호주 에너지 기업 오리진 에너지에 ‘기후 로비와 관련된 정보를 공개하라’는 안건을 상정했다. 쉐브론에서는 안건이 반영됐으며, 나머지 기업에서는 각각 찬성률 42%, 46.35%, 46.32%를 기록했다.
유럽 기업들도 관련 제안을 받았다. 렙솔과 에퀴노르, 쉘, BP, 바스프는 “기업의 로비정책이 파리협정과 얼마나 부합하는지 공개하라”는 주주 결의안을 받기도 했다. 더불어 기업이 속한 산업협회와 입장이 일치하는지, 만약 일치하지 않다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설명해라는 요구도 받았다. 이런 종류의 주주제안은 앞으로 개별 기업의 로비 정책과 로비를 맡은 구체적인 단체명까지 공개하라고 발전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CA100+ 관리 대상 기업의 10%는 오히려 선제적 대응에 나서기도 했다.
호주 광산기업인 리오 틴토의 경우 기업 스스로 온실가스 배출량과 목표 실적 공개를 제안하고, 주주들에게 이 제안에 찬성할 것을 권고했다. 더불어 반 기후위기 대응 로비를 진행하고 있는 산업협회에 가입되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산업협회에 가입한 기업들이 파리협정과 불일치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지 매년 확인하고 있다”며 “기후정책에 대한 입장이 우리와 다르다면, 협회 탈퇴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노르웨이 석유회사 에퀴노르는 기후정책에 대한 입장차가 발견되자 호주 석유생산 탐사협회를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지금까지 기업의 로비는 투자자들의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로비가 포트폴리오 성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투자자들은 파리협정에 일치하지 않는 기업의 로비를 투자 리스크로 해석하고 있다.
스웨덴 연기금 AP7의 요한 플로렌 ESG 책임자는 “지금까지 투자자들도 로비는 투자자가 떠맡을 사안이 아니라 정치적 이슈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기업의 로비활동이 시스템적인 위험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투자자의 위험이 될 수밖에 없다고 관점을 바꿨다”며 “파리협정은 각 국에서 입법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를 막으려는 기업이 있다면, 이는 스스로 제도적 리스크를 조성하는 셈”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최대연기금인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 캘퍼스(CalPERS) 또한 “파리협정과 일치하지 않는 로비 활동은 투자자들에게 재정적, 법적, 평판적 위험을 야기한다는 걸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후대응 넘어 노동, 인권 정책도 로비 대상에 오르는 중
데이터 공급자에 노동 관련 지표 추가 요구하기도
한편 기후위기 대응을 넘어 노동, 인권 정책을 통과시키기 위한 로비도 이뤄지고 있다.
아비바 인베스트, 호주 슈퍼(Australian Super), 피델리티 자산운용, 슈로더 자산운용 등 56개 자산운용사들은 ‘Find It, Fix It, Prevent It’ 캠페인으로 입법과 기업 관여, 정보 공개 등을 통해 전 세계 약 40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대판 노예 제도를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 영국의 자산운용사 CCLA는 ESG 등급에 현대판 노예제도를 포함시키기 위해 데이터 분석 업체들에게 로비를 시작하기도 했다. ESG 등급을 산출하는데 기본적인 근거가 되는 데이터 분석업체가 현대판 노예제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 기업이 자발적인 개선에 나서는데 충분한 압박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는 자산운용사들은 영국정부에 현대판 노예제도 감독을 강화하고 인권 실사법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로비를 벌이고 있다. 기업이 이니셔티브 가입 등을 통해 자발적으로 이런 관행을 수정하기를 기다렸지만,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가 이어지면서 로비도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
- 천연가스 이어 원전도 ‘녹색 산업’으로
- 천연가스가 녹색 산업? EU 택소노미를 둘러싼 갈등
- 넷제로 선언기업 전략 밝힌 기업 '제로', CA100+ 보고서
- 800개 도시 중 90% 이상이 기후 위기 직면, 기후 대응 계획 수립한 도시는 절반에 그쳐
- 듀폰 플라스틱 이슈 7%에서 81% 지지로, 워런버핏과 블랙록 공개다툼까지... 치열해진 ESG 주주제안
- 【뉴스읽기】신생 투자자 ‘엔진넘버원’은 어떻게 엑손모빌 주총 반란의 주역이 됐나
- 유럽 은행들의 실상은? 기후 정책ㆍ스트레스테스트 준비 디테일 부족해
- 기업의 탄소 정책 발자국 ‘스코프 4’ …기후 정책에 가장 적극적인 기업 15곳은?
- 韓・美 재계 무역확장법, 중대재해처벌법 등 ”무역 제한과 기업규제에 대처할 것"
- 이것까지 제안한다고? … 스케일 다른 글로벌 주주제안
- 기업의 기후 로비, 새로운 표준이 등장하다
- 반(反)기후 로비 기업, 주주행동주의 집중타깃...글로벌 자산운용사 악사 의결권 정책 발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