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록의 운영자산은 10조 달러(1경1800조원)에 육박한다. 그가 대기업 총수에게 보내는 연례서한은 기업들의 운영행태를 바꾸는 ‘반드시 읽어야 할 글(must-reads)’로 여겨진다. 지난 5월 ESG 행동주의 투자그룹인 엔진넘버원이 엑손모빌의 이사진 교체에 성공한 것도 블랙록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FT는 최근 블랙록과 래리핑크를 조망하며, ‘10조 달러짜리 남자’ ‘월가의 왕’이라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너무 큰 권력에 대한 비판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블랙록에게 향한 부담감 때문일까. 최근 블랙록은 자신의 권력을 일부 포기하겠다는 제안에 나섰다. 블랙록의 가장 큰 기관고객 중의 하나인 연기금, 대학기금 등 대형 기관투자자들에게 ‘직접 투표권’을 확대하기로 했다. 이번 조치로 블랙록의 주식 4조8000억달러의 인덱스주식 자산의 40%에 해당하는 2조 달러(2389조원)가 주주 투표권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앞으로는 임원 보수와 기후변화 등 ESG와 관련해 기관투자자들이 주주로서 직접 투표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방침은 내년부터 시작될 예정이며, 장기적인 주주총회 투표 방향을 이동시키는 첫걸음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나온다.
10조 달러 막강파워 블랙록, 안팎의 비판 시달려
지금까지 기관투자자들은 블랙록과 같은 대형 자산운용사들에게 ‘프락시 보팅(proxy voting)’이라고 불리는 위임(대리)투표를 맡겨왔다. 블랙록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FT는 “기업 이사회 및 이사진 투표, ESG 지표, 감사 기준 및 급여 등을 포함하는 이슈에 대해 얼마나 많은 투자자들이 직접적인 발언권을 원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블랙록의 권력 이양’이라는 뉴욕타임즈의 표현대로, 이번 조치는 너무 많은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주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공격을 받아온 블랙록이 비판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 중 하나다. 블랙록은 최근 몇 년 사이 안팎으로 공격을 받아왔다. 전 지속가능성 책임자인 타리크 팬시가 내부고발을 통해 “블랙록의 ESG를 마케팅”이라며 비판한데 이어, 마르코 루비오 미 상원의원은 최근 ESG 중심의 투자 물결을 바로 잡기 위한 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회사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정책을 채택할 경우, 주주들이 회사를 고소할 수 있도록 하는 ‘마인드유어오운 비즈니스법(Mind Your Own Business Act)’을 발의했다.
브라질 아마존의 불법 삼림 벌채를 모니터링하는 단체 ‘아마존워치(AmazonWatch)’는 2019년 보고서에서 블랙록이 아마존의 삼림 벌채를 담당하는 농업회사들의 지분 25억달러 이상을 보유한 최고 투자자들 중 한 명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일부 환경단체들은 ‘블랙록의큰문제(일명 BRBP, #BlackRocksBigProblem)’이라는 단체까지 결성해 블랙록의 기후변화 움직임을 강력히 압박하고 있다.
때문에 블랙록이 투표권 일부를 주주들에게 돌려주는 것은, 비난의 화살을 일부 피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도 있다. 수렌 곰시언(Suren Gomtsian) 영국 웨스트요크셔 리즈대 법학교수는 FT에 “대리투표 변경으로 연기금은 직접 발언권을 갖게 되겠지만, 서로 다른 자산 소유자들의 투표가 조정되지 않고 서로 상쇄되면서 투표 결과에 대한 회사 경영자들의 영향력을 더 강화하게 될 것”이라며 “이 결정의 진정한 승자는 블랙록 그 자체”라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KB금융, 신한금융, 삼성, 네이버 등 국내 대기업에도 영향 미칠까
블랙록의 이 같은 변화가 다른 자산운용사들에게도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블랙록은 앞으로 투표 선택권을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확실히 했다. 지난달 30일 블랙록이 고객들에게 보낸 서한에는 “특정 지수 전략에서 대형 기관투자자들을 위한 투표 선택권을 확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의 보유자금은 글로벌 기관별 별도 계좌와 미국과 영국 블랙록의 특정 펀드에서 운용된다. 해당 계좌는 대규모 공적연기금이 포함된 고객들을 위해 맞춤형으로 밀착 관리 운용된다. 물론 이전처럼 블랙록의 위임투표 서비스를 계속 받을 수도 있다.
블랙록은 내년부터 기관투자자 고객들이 자사의 투표과정을 어떻게 할지, ‘제3자 대리투표 정책’ 메뉴에서 이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블랙록은 이전에도 일부 고객이 투표권을 행사했으나, 기술적인 기반이 부족해 지난 1년 동안 이를 보완했다고 밝혔다. 블랙록은 운용 문제, 법적 문제를 해결한 후 ETF나 인덱스 뮤추얼펀드 및 기타 다른 상품 등에도 대리투표 선택권을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영국 연금부서 장관인 가이 오퍼만(Guy Opperman)은 환영의 뜻을 밝히며, “투자자들의 투표 선택권을 확대하는 유사한 서비스를 폭넓게 개발하도록 장려하겠다”고 밝혔다.
블랙록은 KB금융지주, 신한금융지주뿐 아니라, 삼성전자, 네이버, 삼성SDI 등 국내 주요 대기업의 지분을 다량 보유한 만큼, 향후 직접 투표권 도입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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